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시오스 2세 (문단 편집) == 어린 황제 == 그러나 아버지인 마누일의 나이가 이미 50살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마누일은 황자를 본 이후에도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이어갔는데, 1176년의 [[미리오케팔론 전투]]를 전후하여 건강이 악화되자 문제는 수면으로 떠올랐다. 결국 죽음을 예감했는지 마누일은 어린 아들을 위해 온갖 안전 장치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밖으로는 그의 장기인 외교술을 발휘하여 주변의 정세를 안정시켰고, 아들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막내 공주인 [[프랑스의 아녜스]]와 약혼시키는 등 [[정략결혼|결혼 동맹]]을 맺었으며, [[1177년]] [[룸 술탄국]]이 침공하자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에서 이를 대파하고 [[1179년]]까지 [[노익장|노구를 이끌로 친정을 불사하는]] 등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여 거꾸로 제국이 압박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안으로는 황후와 대제의 조카인 [[알렉시오스 콤니노스#s-4|알렉시오스 대군주]](1135?~1182, [[요안니스 2세]]의 차남 안드로니코스의 아들)를 필두로 한 섭정단을 꾸렸으며, 죽어가는 와중에도 [[왈도체|힘세고 강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고명 대신으로 붙여주었다. 그럼에도 알렉시오스 2세의 자리는 불안했다. 어린 황제는 단독 황제가 되었음에도 놀이나 각종 경기 구경에 관심을 보였고, 황제를 대행할 섭정단은 서방인들이 많았기에 썩 지지받지 못했다. 결국 알렉시오스 2세 이전의 황위 계승권자이던 마누일의 장녀 [[마리아 콤니니]]가 남편 [[몬페라토의 레니에르]]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고 섭정 알렉시오스 대군주는 여론의 압박에 진압을 흐지부지 끝낸 상황이었다. 결국 이 틈을 파고든 당숙 [[안드로니코스 1세|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여론을 업고 황태후를 비롯한 섭정단을 모조리 잡아 죽임은 물론이요 잠재적인 경쟁자인 마리아 황녀 부부까지 제거해버렸고, 어린 알렉시오스 2세는 당숙과 공동 황제가 되어 선임 황제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